Monday 3 December 2018

어렸을 때, 파도에 떠내려가는 비치볼을 쫓다가 밀물에 휩쓸린 적이 있다.
헤엄치는 속도보다 물의 유속이 더 빨라서 점점 멀어지는 해안가를 보며 당황했다.
얼떨결에 근처의 암석에 매달렸고 그제서야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겪는 상황에 살짝 동요했으나 크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나이였는지.
구조원이었는지 지나가던 아저씨였는지 알 수 없던 누군가가 와서 데리고 돌아가 주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그 뒤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께 질책을 받았던가? 같이 왔던 친구가 걱정을 해 주었던가?
볼을 끝까지 쫓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익사가 아무렴 소사보다는 편한 죽음이지 않을까?
줄곧 잊고 있었던 쓸데없는 사건이 여태껏 나를 겁쟁이로 붙잡고 있는 하나의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의식은 무섭구나. 난 정말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다.
사실 나는 유아기에 의사의 오진으로 필요 없는 심장 수술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건강이나 병원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 일화를 꺼내며 의사는 믿을 족속이 못 된다는 욕을 하시곤 했다.

거울 앞에 서도 등 뒤가 비춰 보이진 않아서 수영장 같은 곳에서 때때로 타인을 통해 잊고 있던 흉터의 존재를 상기한다.
오랜만에 들른 패스트푸드점에서 한 때 신상품이었던 버거가 일반 메뉴에 있는 것을 보며 새삼스레 스스로가 낡은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