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7 January 2004

친밀한 미지성의 풍경: 지연된 시간들, 지체되는 이야기들, 늦게 도착하는 사건들

남한의 자생적 씨네필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씨네필 문화에서 영화의 모더니즘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이 모던 영화들을, 그러니까 누벨바그 영화들이나 펠리니, 베르히만, 브레송, 부뉴엘 또는 그 이후에 계속 이어지는 장 마리 슈트라우프나 다니엘 유이레의 영화들 혹은 베르톨루치의 상업 영화들, 이런 모던 영화들을 뒤늦게 보기는 했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씨네필들이 그것을 동시대적 경험을 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고전주의와 결별하고 모던한 영화의 시대로 들어설 때, 그래서 영화가 고전주의 시대에 19세기 예술의 전통을 그대로 껴안고 오페라나 아니면 펄프 소설들이나 또는 보드빌 연극이나 만화나 인상주의 그림들이나 혹은 인상주의 음악들, 그 전통을 고스란히 껴안고 영화를 만들었던 그 시대의 고전주의, 그것에 대해서 영화는 끊임없는 무게를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가 아닌 것을 통해서만 영화를 이야기해야 됐었습니다. 그러나 모던 영화의 도착은, 질문했었습니다. 영화에 대해서 영화의 자의식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유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모던 영화의 도착과 함께 카메라가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들은 그 경험을 미처 갖지 못했습니다. 그걸 그냥 건너뛰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그 순간, 그러니까 영화의 모던함이 도착했었던 바로 그 순간, 남한의 근대사는 박정희를 맞이한 겁니다.

그 이후 좀 더 정확하게 1961년부터 광주를 거쳐 노태우의 올림픽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 살아왔습니다. 물론 90년대가 저는 한국이, 남한이, 남북한이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토록 철저한 무게 속에 그 80년대까지 고스란히 살았었을 때 매우 유감스럽게도 씨네필들은 영화 그 자체를 성찰할 수 있는 동시대적 경험을 획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뒤늦게 도착한 것, 밀처져 도착한 것, 그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이 90년대의 자생적 씨네필 세대에게는, 자 이런 표현을 용서하십시오. 도착증의 증세가 있습니다.

세 가지 기이한 합병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이 새로운 자생적 씨네필들은 세 가지 증세 중 하나를 하여튼 껴안아야 됐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허기진 탐식증에 시달리는 씨네필입니다. 무조건 봐야겠다고 닥치는 대로 보고, 그 보다 못한 것을 답답해한 나머지 빌려온 비디오를 데크에 걸고서는 패스트 포워드로 보고 그리고 편수 메꾸기에 시달리는, 그러면서 과거 영화들을 허기지게 뒤져 나가는, 네크로필리아적 시체 애호증의 증세가 그 첫 번째일 것입니다.

두 번째 증세는 뒤죽박죽의 타임머신을 탄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 체계 없이 닥치는 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영화를 봄으로써 영화와 영화 사이에 놓여있는 상호영향관계라던가 인과관계나 또는 그 역사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하고 그것을 그냥 뒤죽박죽으로 마치 타임머신에 실려 이 시대와 저 시대를 건너뛰듯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영화 담론은, 영화에 대한 지식은 거의 미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비유법으로서가 아니라 아주 엄격하게 정신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자생적 씨네필이 앓고 있는 정신병은, 그러니까 그 영화를 쳐다볼 수 있는 타자의 자리도 없고, 내가 그 영화를 보고 있다고 나 자신의 자아를 성숙하게 느낄 수 있는 그 주체의 자리도 없는, 그러니까 오직 타자를 대신하는 가짜 타자, 소문자 타자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을 거기 세워 놓고, 그것을 우상 숭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호소하는 영화적 에고 사이에서 애매하게 버팀목을 설정하고 영화를 보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겁니다.

세 번째 자생적 씨네필시대 세대들이 앓고 있는 병은, 사실 이게 가장 끔찍한 피해입니다. 컬트 증후군입니다. 성찰도 없고, 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이 영화를 다 보자니 자신도 없고. 백년의 영화를 다 보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댑니다. 그러다 보니 남은 방법은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이한 영화만 골라서 찾아 보면서 그걸 갖고 뽐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에는 상대에 대해서, 영화에 대해서 사랑하기는 커녕 영화를 상대로 환상적 새디스트가 되는 겁니다. 즉 자기 자신을 초자아의 자리에 갖다 놓고, 영화가 아니라 자기를 초자아의 자리에 갖다 놓고, 입법의 자리에 갖다 놓고 그리고 자기가 법을 집행하고 싶어하는, 자기 멋대로 영화사를 쓰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영화에 대해서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런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테면 씨네마떼끄에서 고전 영화를 할 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존 포드의 위대한 영화들이나 하워드 혹스의 영화들이나 박스오피스의 영화나 히치콕의 영화를 할 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오시마 나기사나 파졸리니의 정말 보기 힘든「살로」같은 영화를 할 때에는 미어터지게 몰려드는 이 기괴한 상황이야말로 저는 자생적 씨네필들의 비극이자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성일, 2004, 01, 07 , [정은임의 영화음악] 중에서 [씨네마떼크 코너 중 '씨네필 문화'편]